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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천정곤 재활용교육정보센터 대표

  • 작성자 사진: 이왕우 남자
    이왕우 남자
  • 2007년 9월 28일
  • 11분 분량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부모 곁을 떠나 돈벌이에 나서야 했습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궂은 일, 고된 생활… 이런 어려움 따위야이 악물고 버티면 견딜만하다고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는 또래 아이들을 바라보는 일을 참기 어려운 아픔이었습니다. 주경야독, 추위와 배고픔을 책으로 달래며 청년기를 보낸 천정곤 대표. 그는 가난과 역경의 시기를 통과했기에 쓸만한 물건이 너무도 쉽게 버려지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아무렇게나 버려져 산처럼 쌓인 쓰레기들이 보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시작한 ‘재활용 사업’! 환경도 살리고 자원도 절약되고… 게다가 수입까지 쏠쏠했습니다. 쓰레기 더미에서 황금알을 캐낸 사나이, 재활용 운동실천가, 천정곤 씨….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만나봅니다. ◇ 중고물품, 이제는 없어서 못 팔 정도

▶ 재활용 운동 실천가는 어떤 직업인가요?

좀 생소하죠. 환경 운동이라면 너무 광범위해서 감을 잘 못 잡습니다. 그래서 조금 국한시켜서 일반 생활용품 중에 버려 지는 것을 다시 쓰는 운동을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스스로가 먼저 하고 제가 하는 것을 이웃들이 같이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교육을 하고 전파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 시작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재활용 운동 교육 정보센터를 시작한 것은 8년 정도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8년 전에 참 시작 잘했다’ 싶으시죠?재활용 센터 운영은 한 15년 되는데요. 쭉 해오면서 물량적으로는 사람들이 많이 사고 팔고, 옛날에는 더러운 것, 귀신 붙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을 이제는 그런 의식은 없어져서 경제적인 가치를 생각해서 사고팔고는 잘 하고 있는데, 환경의식이 높아지지 않는 거예요. 서구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어린애들부터 노인네들까지 부모나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는 케케묵은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세월에 뒤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재활용을 통해서 이런 의식을 바꿔줌으로써 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 재활용 하는 종류가 너무도 많을 것 같은데요? 가전제품, 가구, 의류, 주방기구류, 사무기구, 사무집기 등 우리 생활 전반에 사용하는 것들은 모두 다 포함됩니다. ▶ 그럼 재활용센터에서 물건을 사주시는 건가요? 한 10년 전에는 버려주면 고맙다고 오히려 수고한다고 여비도 주고 음료수도 주고 그랬었거든요. 이제는 일반 시민들이 다 경제 가치를 느끼고 있습니다. 내가 버릴 것도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고 재활용센터 여기저기에 전화를 해서 가격을 높이 주는 데에 물건을 판매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요즘은 저희가 거의 다 사서 옵니다. ▶ 사실 멀쩡한 것들을 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한 80-90% 정도는 다 재활용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진짜 고장이 나거나 완전히 깨져서 못쓰는 것들은 5% 정도에 불과합니다. ▶ 물건을 사 가시는 분들이 많아야 될텐데요? 요즘은 없어서 못 팝니다. ▶ 수입은 어떠신가요? 없어서 못 파니까 수입은 오히려 줄어들죠. 옛날에 재활용센터가 적을 때는 버리는 사람이 버릴 때가 마땅치 않아서 싼 가격에도 주고 공짜도 주고 해서 샀는데, 요즘은 재활용센터가 포화상태라고 할까요? 전국에 9,000개-10,000개 정도로 추산하고 있는데, 너무 많다보니까 물건 확보하기가 전쟁이죠. 요즘 정보지나 인터넷에 보면 재활용센터 전화번호가 많이 있거든요. 그래서 전화를 하면 쫓아와서 높은 가격을 주겠다는 곳에다 팔죠. 저희가 그런 것을 받아와서 다시 손질하고 깨끗하게 해서 재판매를 하고 있습니다. AS도 6개월 정도는 보장을 해드립니다.◇ 가전제품 수리 기술로 버려진 제품 재판매 하면서 시작▶ 1994년에 울산시 청소과에 ‘대형 폐기물의 효율적인 처리방안’을 제안하시면서부터 이 일을 시작하신 것이 맞습니까? 제가 전자업을 하기는 1983년도부터 했습니다. 한 10여년 일하면서 기술도 숙련이 되고 우리나라 경제도 성장이 되면서 1990년대 초 시기에 너무 가전제품과 가구들이 많이 버려졌습니다. 새 아파트를 지어서 이사를 가게 되면 너도 나도 새 물건을 사가지고 가지 헌 물건은 하나도 안 가져가고 몽땅 버렸습니다. 그 때는 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되지도 않을 때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버릴 때도 없었습니다. 산골짜기라든지 다리 밑이든지 건물 뒤에 몰래 밤에 갖다 버리는 것이 대다수였죠. 그럴 때 저는 기술자로서 그것을 주워 와서 깨끗하게 세척해서 돈이 됐습니다. 냉장고 고치는데 7,000원, 10,000원 받는데 그걸 가져와서 팔면 35,000원, 40,000원 받으니까요. 근데 그렇게 가져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부끄러웠습니다. 남들 버려 놓은 것을 몰래 가져오면 괜히 머리가 간지럽고, 그래서 남들 밤에 몰래 버릴 때 나도 밤에 몰래 가서 가져오고 새벽 일찍 가져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 1년간 팔다보니까 이건 울산만 문제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때 매스컴에 도시외관을 저해하는 주요인으로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것에 대해서 많이 보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버려지면 시 청소과에서 치워야 하는데 청소과에서는 가장 큰 숙제죠. 어떻게 하면 치울 수 있는가, 도시미관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가 고민하고 있을 때에 제가 주워다 재판매한 경험을 A4용지로 석 장으로 제 나름대로 적어서 울산시에 제출했습니다. 제출하고 제가 한 1시간 정도 브리핑 하는데 그 담당자가 머리를 끄덕끄덕 하더라고요. 한 소시민이 와서 자기들의 아주 골칫거리를 해결할 수 있다는 방안을 내놓으니까요. 집에 와서 5일만에 연락이 와서 1993년도에 울산시 특수시책으로 제가 제안한 재활용센터 설립할테니까 공무원들은 아무 것도 모르니 제가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묻길래 기꺼이 도와드리겠다고 했죠. 그래서 부지선정과 건축물을 지어서 시 조례안을 만들고 1994년도 6월달에 개장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장식을 하자마자 대형 쓰레기를 버릴 데가 없던 시민들이 우리가 전화 한 통이면 무료로 안방까지 가서 들어내 주니까 너무나 고맙고, 시에서는 그런 쓰레기가 안 버려져서 재활용 해주니까 고맙고, 더 좋은 것은 쓰레기 매립장이 장롱이나 쇼파가 막 들어가니까 매립장 수명이 20년 계획했던 것이 7년-8년 당겨져 버리는 거예요. 근데 저희들이 재활용을 하니까 쓰레기 매립장으로 가는 쓰레기량이 많이 줄어들었죠. 처음에는 중고를 아무나 잘 안 사갔습니다. 남 쓰던 것 더럽다, 때로는 귀신 붙었다는 생각을 하던 때라서 중고를 돈 주고 사는 사람이 없고, 처분은 해야 하니까 저희들이 소년소녀 가장이나 홀로 계시는 독거노인에게 기증을 많이 했죠. 또 그 때는 울산항에 외국배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다 헐값으로 수출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매스컴에 집중조명을 받게 되었고, 쓰레기가 울산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전국에서 매스컴을 보고 듣고 사람들이 울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원래 가전제품 수리 기술을 가지고 계신건가요? 제가 대구에서 대구공고를 나와서 울산의 현대그룹에 취업을 했어요. 직장생활 5년 정도 하다보니까 직장생활 해서는 제 가족이 살기가 힘들겠더라고요. 제가 5형제 중에 맏이고, 시골에 부모님이 계시고 해서 직장을 나와야겠다 생각을 했죠. 직장을 나와서 전자 수리기술을 배워서 수리센터를 차렸죠. 요즘 각 메이커들이 전화를 하면 수리하러 집에 오지 않습니까? 그것을 했거든요. ▶ 이런 재활용센터가 비즈니스로 커지는 데는 천대표님의 노하우가 있었을텐데요?.제가 그 때 당시에 프랜차이즈나 체인점 형태로 했으면 돈은 지금보다 훨씬 더 벌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한 9,000개 재활용센터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전혀 그런 생각은 갖지 않았고, 제 센터에서 돈 벌은 것을 가지고 전국에 돌아다니면서 확산을 하는데 초창기 1년동안 120군데를 개장해주었으니까요. 각 구청, 시에서 센터를 열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도와달라고 해서 가서 그 센터가 개장하기까지 일일이 지도하고 교육까지 다 해서 오픈을 시켜줬습니다. ◇ 가난했던 어린 시절, 혼자 힘으로 중고등학교 학비 벌며 공부▶ 원래 고향이 경상북도 영천 변두리 작은 마을이셨다고요?저의 부모님이 제가 태어날 때는 제법 잘 살았는가 봅니다. 그런데 어느 농촌도 다 그렇겠지만 농한기 때는 일이 없으니까 모여서 술먹고 노름하는 것이 다반사였던 모양입니다. 그 때 저의 아버님도 그런 쪽에 속해서 가산을 많이 탕진하고 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졸업할 무렵에는 제 친구들의 일부는 중학교에 진학을 하는데 저는 그럴 형편이 못돼서 부산에서 연탄직매점과 식당을 하시는 외삼촌댁에 가서 밥배달, 연탄배달 하고 청소도 하면서 일을 돕게 됐죠. 그러면서 어린 나이에 힘이 없어서 연탄 양쪽에 2개씩 들고 가면 허벅지 옆에 연탄이 묻어서 옷이 반질반질 하고, 여름에는 짧은 바지를 입고 하니까 살갖이 반질반질 해지는 겁니다. 확실한 꿈이 있으면 그렇게 고생을 해도 괜찮은데 거기서는 비전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공부를 해야겠다 생각해서 1년여의 그 생활을 접고 아예 가방과 까만 교복을 맞춰 입고 저의 부모님과 외삼촌께 허락을 받았죠. 그래서 우리 고향쪽에 있는 임보중학교에 처음에는 제가 등록금을 내고 들어갔고, 학비라든가 생활비가 집에서는 형편이 어려워서 지원이 안되니까 학교에서 장학금으로 일부 지원을 받고, 배구선수를 하면 육성회비를 면제받기 때문에 그렇게 또 면제를 받고, 선도부장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죠.그렇게 3년 중학생활을 자취를 하면서 마치고, 고등학교는 집에선 말도 꺼낼 수 없는 상황인데 제 스스로 야간부를 가서 내 스스로 돈을 벌어 공부해야겠다 싶어서 대구공고 야간부 기계과를 지망해서 합격하고 다니면서 아침에는 소년조선일보라고 시민중학교 정문앞에서 신문을 팔아서 그 돈으로 대구에서 자취생활과 학비로 하고, 학교에서도 장학금을 받아서 다녔죠. ▶ 초등학교 때는 아주 말썽꾸러기셨다면서요?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영향이 가장 크지 않습니까? 부모님이 가정생활에서 그런 어려움이 있다보니까 그걸 보고 자란 자식들은 당연히 성격이 삐뚤어지게 되죠.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칼까지 가지고 다니면서 나쁜 짓을 할 정도로 학교 전체에서 문제거리가 되었죠. 가정 형편이 그렇다 보니까 부모님이 자주 싸우는 것을 보게 되고, 한번은 싸워서 어머님이 턱뼈까지 빠지는 것을 본 기억도 있고, 그러면서 아마 삐뚤어진 것 같아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이후에 부산에서 하도 고생을 하다보니까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또래의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것을 볼 때 진짜 자존심도 엄청 상하고, 이제는 나도 공부를 해서 남다른 뭔가를 이루어야겠다, 성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죠. 그래서 아침에 배달하고 청소하고 나서 자전거를 타고 해운대 옆에 동백섬을 자주 돌면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서서 울기도 하고 나의 꿈을 새로 다지고 했죠. ▶ 그 때는 어떤 꿈을 생각하셨나요? 우선 공부를 해서 우리 형제들과 부모님을 부양할 수 있는 위치가 돼야겠다 생각했죠. 그러기 위해서는 기술도 배우고 어느 정도 공부도 해야 가능하다는 막연한 꿈에 일단 배워야 겠다는 것만 있었지 누가 나한테 꿈을 심어줘서 내가 대통령이 돼야겠다 뭐 이런 꿈은 갖지 못했구요.▶ 가정형편이나 여건 때문에 계속 삐뚤게 나갈 수도 있었는데, 본성이 착하시니까 바른 길을 자꾸 찾으신 거네요. 땀을 흘려보고 눈물을 흘려 보니까 그 때 변화가 된 것 같아요. 제가 어릴 때부터 고집이 엄청 셌대요. 고집불통의 어린애였는데, 고생을 거치면서 공부라든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추진력으로 바뀌는 거죠. 그래서 저는 요즘 말썽꾸러기 애들 보면 크게 될 아이라고 오히려 칭찬 해줍니다. 어린 애들은 얌전하게 있는 것보다 삐뚤게 나가더라도 바로 돌아오면 그런 애들이 또 큰 일 할 수 있는 재목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공부를 잘 하셨는데도 대학 진학까지는 벅차셨나보죠? 대학 진학을 하려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공부를 했습니다. 학원에 등록해서 다니던 중에 수입은 적고 먹는 것은 부실하다보니까 3학년 2학기 정도에 영양실조가 오더라고요. 앞의 칠판을 보면 두 개, 세 개로 보이고 잘 안 보여요. 그 때 사진을 보면 저와 같이 자취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다른 친구들이 사진을 보고 “이 사람 아직도 살아있나?” 라고 할 정도로 갈비뼈가 튀어나오고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고등학교 다니면서 어려움이 많았죠. 시골에서 대구에 유학을 보내는 것이 어려운데 생활을 제가 해야되고 하니까요. 몸이 그 지경이니까 진학은 도저히 안되죠. 그래서 꿈을 접고 그래도 성적이 괜찮아서 울산의 현대 그룹에 입사하게 됐죠. 먹고 사는 것은 해결되겠다 싶어 취업을 나가서 연수기간에도 성적이 좋아서 제가 2등 정도로 졸업을 했습니다. 수료를 하는 과정에 성적도 좋고 열심히 하니까, 보통 고등학교 졸업자는 생산직으로 현장에 투입되는데 저는 품질 관리실에 기사로 특채처럼 뽑혀 올라가서 사무실에서 근무했죠.

▶ 손재주는 원래부터 탁월하셨나요? 특별한 손재주가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직장생활이 해가 거듭될수록 저한테 조금 무거운 짐이 느껴지는 거예요. 저희가 5형제인데, 저 때문에 제 동생이 중학교를 못가게 됐죠. 제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들어가다 보니까 그 동생은 중학교를 못 가고 부산 외삼촌댁에 갔죠. 내 동생이 내 전철을 밟으면서 고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더 제 삶의 채찍질을 가하는 계기가 되었죠.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한 5년 하다 보니까 직장생활을 해서는 내 가족은 먹고 살 수 있겠는데, 내 형제나 부모는 부양할 수 없겠다 싶어서 직장을 그만 두기 전에 전자공과 기술학원에 야간으로 등록을 해서 TV 고치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3개월 뒤에 수료를 하고 나와서 회사 바로 앞에 동네에서 전담수리센터를 냈죠. ▶ 사장님이 되신 건데, 돈 많이 버셨나요? 첨에는 돈보다도 성실 하나로 수리가방 끌고 다니면서 온 동네 돌아다녔죠. 열심히 하다가 중매로 26살 어린 나이에 결혼도 하게 됐죠. 그래서 결혼 후에는 집사람이 수리센터에서 TV를 팔고, 저는 수리를 다니고 하니까 자연히 돈이 잘 모였죠. 그러다가 이웃가게 하나가 부도가 나서 제가 인수를 하고, 가게가 두 개가 되다 보니까 한 동네에서 제가 독점을 하게 됐죠. 한 10여년 해보니 기술은 축적이 되고 했는데, 90년대에 우리나라 전체가 산업화로 가면서 생활이 나아지면서 버리는 제품이 자꾸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수리하는 것보다 버리는 것 주워다가 수리 세척해서 팔면 35,000원, 50,000원씩 받을 수 있으니까 그것이 훨씬 수입이 낫지 않습니까? 그래서 밤에 몰래 주으러 다녔죠. ▶ 그 전에 직장생활을 하시면서도 배움에 대한 열망 때문에 기독음악 통신대학에 입학하신 것은 언제인가요? 기독음악 통신대학이면 음악가가 되고 싶으셨던 건가요? 그건 1984년도 일겁니다. 저의 아버님이 노래를 참 잘 부르셔서 저도 좀 타고 난 것 같은 데 먹고사느라 그런 기회나 여유가 전혀 없었는데,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 성가대를 하면서 목사님이 저를 추천해서 성가대 지휘를 맡아 달라고 하시니 제가 아는 게 없잖습니까? 그래서 기독음대에 입학해서 지휘 공부를 하고 교회에서 한 10여년 지휘를 했습니다. ◇ 외국에서는 오래된 물건일수록 자랑스럽게 생각해 ▶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처음 시작할 때는 중고를 누가 사갈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어요. 그 때는 중고에 대한 인식이 너무 안 좋았기 때문에요. 그래서 저는 고쳐서 나눠주면 얼마든지 쓸 수 있겠다 생각해서 울산시에 제안을 했죠. 그런데 그것이 받아들여지고 의식 교육을 하다 보니까 국민들이 집에서는 새 물건을 쓰지만 가게나 사업장에서는 중고를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변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 둘 팔리기 시작했죠. 새 것에 비해서 가격이 십분의 일 정도 밖에 안되니까 엄청 싸서 너도 나도 중고를 사서 쓰기 시작했죠. ▶ 우리는 아직까지 중고에 대해서 찝찝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데, 조금씩 그 인식이 변하고 있는 단계인가요? 예, 많이 바뀌었습니다. 버려지면 환경이 더럽혀지고 나에게나 내 자식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은 아직 거의 없고요, 돈의 값어치가 있으니까 쉽게 안 버리고, 또 사가는 사람도 새 것 사는 것보다 싸게 살 수 있으니까 물물교환은 많이 이루어지는 형태인데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버린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가 36년 일제 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너무 빼앗기고 없이 살았던 국민이 되다 보니까 산업화로 인해 경제가 나아지고 물품이 풍족하다 보니까 절제력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 40-50대 분들이 경제 주체인데, 이런 분들이 어렵게 공부하고 없이 살다가 돈을 좀 만지니까 저축이나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보다 과소비 쪽으로만 일변하는 것 같아요. 그 내면적으로 보면 이해는 하지만 이것을 교육차원에서 좋은 방향으로 이끌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재활용 정보 교육센터를 운영하면서 유럽이나 미국, 일본, 동남아 등 외국을 많이 다니면서 자료 수집을 하고 선진지역 견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럽 쪽에서 보면 버려지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할아버지 쓰는 것 아버지가 쓰고 내가 물려 써도 그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남들 앞에 내놔도 오히려 자랑스럽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 풍토가 우리는 안되어 있습니다. 형님이 쓰던 것 내가 물려 써도 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요즘 신제품 좋은 것 많은데 왜 헌 것을 쓰느냐고 천시하는 풍토가 많은데, 이것이 환경을 되살리는 데 악영향을 준다는 내용과 자원 보존 차원의 교육을 어릴 때부터 몸에 배이게 하면 자연적으로 해소되는데 그것이 안되어 있어요. 그래서 재활용정보교육센터를 세운 목적도 거기에 있습니다. 전국의 재활용센터를 통해 1년에 50조 정도가 재생산 되고 있는데, 이것이 쓰레기로 버려져서 토질과 수질이 나빠진다고 생각해보세요. 앞으로 30년, 50년 뒤에는 사람이 못 사는 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요즘은 쓰레기 매립장에 가도 대형 폐기물이 거의 없습니다. 재활용센터에 다 들어오죠. ▶ 아이들에게도 교육이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외국에서 보신 사례에 대해서 말씀 좀 해주시죠. 제가 독일에서 고등학교 교장직을 은퇴하시고 노부부가 사는 전원주택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근데 자기 집의 정원에서 생산되는 유실수를 가지고 자기 생활의 주식으로 쓰는 거예요. 그런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더라고요. 교장선생님으로 은퇴하셨으면 그 나라에서 중산층 정도는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집 가장 높은 곳에 빗물을 가둬 놓는 물 저장 탱크가 있더라고요. 그 물로 정원관리라든가 모든 씻는 것은 다 하는 거예요. 먹는 물만 수도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이 얼마나 경제적이예요. 그리고 한 120년 된 피아노를 놓고 치면서 ‘이것은 할아버지 때 쓰던 것’ 이라면서 이야기를 하고, 100년도 넘은 숟가락을 같이 놓고 쓰더라고요. 그런 생활들을 볼 때 ‘아,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일이다, 환경의 가장 가야할 표본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의식을 어릴 때부터 교육으로 반드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대표님 댁 자녀분들은 아주 훈련이 잘 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우리 큰 애가 군대 갔다와서 대학 4학년이고, 둘째가 딸인데 대학 3학년이거든요. 큰 애는 올 여름방학 때도 저희 재활용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한 달 동안 땀 뻘뻘 흘리면서 냉장고 청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애들 스스로는 새 것을 거의 절대 못 삽니다. 저도 새것을 잘 안사는데 혹 MP3나 디지털 카메라같이 중고가 잘 안 나오는 것들은 한 두 번 사준 적은 있지만 다른 것들은 거의 다 중고를 씁니다. ▶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이 부인을 만나 결혼한 것이다.’라고 말하셨는데... 아마 역사상 결혼식 때 10시간 정도 운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집사람은 서울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저는 울산에서 있었는데 처남의 중매로 만나서 몇 번 왔다갔다 하다가 제가 저의 집사람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보려고 교회에 방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사모님을 만나 대화를 하는데 집사람이 한 4년 동안 새벽 기도를 빠지지 않는다고 하시더라고요. 교회학교 교사도 하면서 충실히 잘 하고 있다는 얘기를 할 때 처녀가 새벽기도를 한번도 빠지지 않고 나올 수 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 사람이 내 반려자가 된다면 평생 나를 위해서 기도 할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을 하고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죠. 그 이후에 결혼 하고도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습니다. ▶ 그렇게 숱한 어려움 끝에 이렇게 환경을 위해 애쓰시는 일을 하시게 되었는데,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운동이 있나요? 운동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선진국에서는 이미 정책이 되어서 쓰레기량이 많이 발생 안 하고 있고, 중국과 같은 신흥 개도국들이 앞으로 많이 문제죠. 제가 아프리카의 가나와 남아공에 견학차 다녀온 경험으로 보면, 아프리카에 가면 우리나라 냉장고가 들어와 있는 곳이 있어요. 340ℓ 정도의 냉장고를 작동되는지 안되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수출된 그대로 컨테이너 박스채로 길에서 파는데 35만원 정도에 팔고 있어요. 그런 것이 한국에서는 8만원에서 10만원 정도 하거든요. 그만큼 거기서 비싸게 팔리고 있어요. 이렇게 비싸지는 이유를 살펴보면요. 중고에 대해 세계적으로 물류가 안되고 있습니다. 일본 중고제품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우리나라가 막고 있고, 우리나라 제품이 중국에 들어가는 것을 중국이 막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중고제품이 아프리카에 들어가는 것을 아프리카에서 막고 있어요. 이렇게 막고 있는 것을 자유무역이 되도록 해줌으로써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도 좀 더 싸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프리카 사람들도 싼 값에 냉장고를 사용하게 되면 음식물을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어 편하고 다른 나라와 문화적 수준 차이도 줄일 수 있죠. 바로 이 중고를 자유무역 하자는 운동이 절실하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를 견학하면서 자유무역을 통해서 그 나라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이 가장 쉽고 돈이 적게 든 방법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세계의 모든 나라가 다 중고를 수입하는 것에 대해 법적으로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관세를 아주 높게 매긴다든가 형식 승인을 아주 까다롭게 하는 식으로 장벽을 치고 있습니다. ◇ 북한에 재활용센터 설립하여 동질성을 회복하는 데 기여하고 싶어 ▶ ‘재활용을 통해서 우리나라 통일에 기여하는 것이 꿈이다.’ 라고 하셨는데, 재활용과 통일이 어떤 관계가 있나요? 제가 10여년 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는데요. 이 준비 때문에 제가 북한대학원 아카데미 과정도 수료하고, 북한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통일이 되고 나서 북한을 우리 정도로 경제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비용이 1,200조에서 1,500조가 든답니다. 독일의 한 연구소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독일의 동서독이 통일이 되고 나서 통일비용이 예상보다 훨씬 많아서 독일 경제 상태가 아직 답보 상태에 있거든요. 우리나라도 수년 내에 통일이 된다면 바로 그런 절차를 밟게 됩니다. 이것을 완충하고 통일비용을 줄이기 위한 획기적인 방법이 바로 이 제도입니다. 어떻게 하느냐면, 통일을 하기 전에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제가 탈북자인 새터민을 울산에서도 한 부부를 직원으로 고용했었고, 서울에서도 북한 김책공대 출신자를 저희 직원으로 고용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영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저희가 버스, 드라이버 같은 영어를 사용하면 거의 못 알아 듣습니다. 우리 전자제품 수리하다 보면 전부다 영어입니다. ▶ 영어를 못 알아듣는 문제와 통일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동질성이 회복되지 않으면 경제적인 문제보다 더 큰 혼란이 옵니다. 얼마 전에 제가 금강산에 가서 북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을 때도 그런 것을 엄청 느꼈습니다. 그래서 동질성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급선무가 재활용 운동을 통해서 그 문화 수준을 높이는 것이 필요한 겁니다. 북한에는 냉장고, TV, 우리가 쓰는 가전제품을 가져다 줘도 그림의 떡입니다. 왜냐하면 전기 사정이 좋지 않고, 수시로 정전이 됩니다. 그리고 휘발유나 경유를 쓰는 제품을 가져다 줘도 기름이 부족해서 못 씁니다. 그리고 그것을 쓸 만큼 환경이 정리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거기는 우리나라 6,70년대의 수준이거든요. 그 때의 수준에 뭐가 필요할까요? 양동이, 냄비, 바가지, 숟가락, 책상, 앉은뱅이 식탁, 소쿠리, 괭이, 호미, 리어커 등이 그들이 가장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물건입니다. 이런 생활용품들을 그들에게 공급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것들이 녹슬고 없어져 가는 추세에 있거든요. 이런 것들을 모아서 북한에 보내서 그들이 아주 싼 가격에 사서 쓰고 자본주의를 배울 수 있도록 판매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평양에 나진에 개성에 재활용센터를 개설해서 우리에게는 이미 한 세대 지나간 물건들이 그들에게는 요긴하다는 것을 통해서 동질성 회복도 하고 자본주의 시장 질서도 도입하고 수준을 점점 높여가서 앞으로는 그들의 전력 사정이 좋아질 때 TV도 냉장고도 보내주고 하는 것이 평양의 재활용센터 같은 북한을 돕는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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